[중앙 칼럼] 서류미비자들의 새 희망
이달 초 LA 한인타운의 한 무료 급식소. 한상차림이 한가위답게 푸짐했다. 드시는 어르신들의 표정은 밝았다. 출입구 옆의 선물꾸러미도 풍성했다. 그런데 이분들 말씀이 없으셨다. 조용히 드시고, 조용히 떠나셨다. 현장의 봉사자는 “어르신들이 서로 통성명을 잘 안 하신다”고 말했다. 서로 말을 섞지 않는 이유는 신분 문제라고 했다. 이유를 묻자 “적법한 체류신분이 없어 공적 부조를 받을 수 없으니 오시는 것”이라며 “불법체류 사실이 알려지고 여기서도 낙인 찍힐까 봐 많이 위축돼있다”고 설명했다. 여전히 타운 한쪽에는 벌집 아파트, 쪽방 하숙집이 존재한다. 건물 한 채를 무허가로 수십 개의 방으로 쪼개 저렴한 렌트비를 받고 내준다. 어르신들의 안전과 편의가 염려돼 실태를 파악하려고 해도 주변에서 막는다. 대책도 없이 들쑤셔놨다가 결국 피해는 한 푼이 아쉬운 시니어들에 돌아간다는 것이다. 수년 전 LA시가 개최한 뒷마당 별채(ADU) 규제 완화 세미나에 많은 건물주가 몰렸다. 그중 많은 이들이 이미 지어둔 무허가 하숙집까지 인정받을 수 있느냐고 질문했던 사정과 맞닿는다. 무료 급식소가 붐비고, 서로 쉬쉬하고, 무허가 하숙집이 경제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서류미비 시니어 때문이다. 타주나 한국에 사는 자녀가 홀로 남은 부모의 싼 렌트비를 내주는 경우가 많다. 이들의 바람은 시니어 아파트지만 여기서도 신분의 벽은 높다. AB 60법에 따라 캘리포니아는 운전면허증을 겸한 신분증을 서류미비자에게 준다. 그러나 이미 고령으로 운전할 수 없거나, 거동이 불편하거나, 장애가 있는 경우는 그림의 떡이다. 낡아빠진 여권밖에는 보여줄 게 없으니 시니어 아파트도, 푸드 스탬프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구조다.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해결책을 내놨다. 서류미비자에게 비면허 신분증을 발급하기로 한 것이다. 개빈 뉴섬 주지사는 23일 이런 내용의 AB 1766 법안에 서명했다. 2013년 발효된 AB 60이 운전면허증을 강조한 신분증이라면 AB 1766은 운전을 못 해도 받을 수 있다. 지난 9년간 AB 60으로 112만 명이 혜택을 봤지만, AB 1766 시행에 따른 수혜자는 최소 160만 명에서 최대 270만 명에 달할 것이란 분석이다. 법 시행은 2024년 1월부터로 더 기다려야 하지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다. 주 정부는 새로운 신분증으로 취업, 보건, 주거, 은행거래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했다. 노점상은 퍼밋을 받고, 학생은 학비 지원이 가능하며, 헬스케어 시설도 이용할 수 있다. 저소득층은 기초생활에 필요한 합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어르신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. 기존 공적 부조 프로그램들과 어느 정도 연계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확실한 변화다. 신분이 없어 전전긍긍하며 생활고에 처한 약자를 두고 퍼주기 식 복지라고 폄훼하지 않았으면 한다. 한 번이라도 한 끼가 아쉬운 이들에게 밥을 퍼준 경험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다. 한인들의 살림살이는 안타깝게도 미국 내 아시아계 가운데 하위권이다. ‘AAPI 데이터’가 6월 발간한 캘리포니아 보고서에서 한인 가구의 연 소득 중간값은 7만6880달러로 아시아 22개국 출신 중 16위였다. 22개국 전체 중간값은 10만1253달러로 차이가 컸고, 한인 중 12.7%는 빈곤층으로 분류됐다. 한 번쯤 주변을 살펴 도움이 필요한 이는 없는지 살펴봐야 할 이유다. 새로운 신분증이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희망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. 류정일 / 사회부장중앙 칼럼 서류미비자 희망 비면허 신분증 시니어 아파트 캘리포니아 주정부